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녀디 야노시 (문단 편집) === [[바르나 전투]](1444.11.10) === 이듬해 [[추기경]] 체자레니는 망하기 직전이었던 [[동로마 제국]]이 로마 가톨릭에 복속하면서까지 요청한 대오스만 동맹 결성을 촉구하였고 여기에 호응한 [[교황령]], 헝가리-크로아티아 왕국, [[폴란드 왕국]], [[부르고뉴 공국]], [[베네치아 공화국]], [[제노바 공화국]]의 연합군이 결성되었다. 여기에 [[왈라키아 공국]]도 참전하게 되었다.[* 왈라키아 공이던 [[블라드 드라쿨|블라드 2세]]는 이 원정을 막으려고 지도부를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[[왈라키아 공국]]으로 물러났다. 이 원정에 참여한 것은 블라드 2세의 차남이었던 [[미르체아 2세]]였다.] 1444년 9월 20일, 연합군은 [[도나우 강]]을 넘어 공격을 개시하였다. 그러나 이전 원정이 끝난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재개된 원정은 예전의 규모에 미치지 못하였고, [[바르나 전투|바르나까지 진격한 연합군은 이곳에서 오스만군에게 포위당한 채 혈투 끝에 퇴각했다]].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르나 십자군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오스만군을 상당히 밀어붙였기 때문에[* 사실 기독교 군대가 거의 다 잡은 전투였다. 그런데 브와디스와프 3세가 욕심을 부려 자신이 갔다올 동안 기다리고 있으라는 후녀디의 충고를 무시한 채 술탄을 잡으려고 전면 돌파를 하다가 역포위되어 죽는 바람에…] 오스만 또한 공세를 지속하지 않았다는 것. 이 전투 뒤에 왈라키아를 통해 퇴각하던 후녀디는 블라드 2세 드라쿨과 그의 아들 [[미르체아 2세]]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는데 그 이유는 확실치 않다. 단지 바르나 전투에서 오스만군에 대한 공격을 주장하고 직접 지휘를 맡았던 것이 후녀디였기 때문에 블라드 2세가 후녀디의 책임을 물으려 했던 것이라고 여겨질 뿐이다. 여담으로 이 사건이 훗날 블라드 2세 드라쿨의 아들, [[블라드 3세]] '체페슈'의 인생을 질곡으로 밀어넣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. [[바르나 전투]]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가 사망하면서 후녀디는 당분간 어린 새 왕 [[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|라슬로 5세]]의 [[섭정]]으로서 헝가리를 통치했다.[* 라슬로 5세는 [[보헤미아 왕국]] 국왕이기도 했는데, 보헤미아 왕국 섭정은 [[얀 후스]]의 이론을 믿는 [[체코인|보헤미아인]] 귀족이었던 [[이르지 스 포데브라트]]가 맡았다.] 후녀디는 바르나의 치욕을 갚기 위하여 군대를 재정비하였고, 1448년 [[알바니아]]의 영웅 [[스칸데르베그]]를 진압하기 위해 무라트 2세가 출병하자 다시 한번 원정길에 나섰다. 이때 주라지는 후녀디가 세르비아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후녀디는 이 경고를 무시하고 그대로 세르비아에 대한 침공을 개시했다. 이에 무라트 2세는 곧장 후녀디를 맞이하기 위한 병력을 나눠 세르비아로 파견하였다. 10월 17일 양군은 [[코소보 전투|코소보 벌판에서 마주쳐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]] 후녀디는 이 전투에서 다시 한번 패배했고, 후퇴하던 와중에 [[세르비아인]]에게 붙잡혀 다시는 세르비아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서약과 함께 그의 둘째 아들인 [[마차시 1세|마티아스 코르비누스]]가 주라지의 조카딸과 결혼을 하기로 약조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